| ►별칭 : 동리(東里), 서담(西潭), 손곡(蓀谷) ►성별 : 남 ►시대 : 조선 중기 ►출생~사망 : 1539년 ~ 1612년 ►출생지 : 홍주 ►본관 : 홍주(洪州) ►주요저서 : 손곡집(蓀谷集) | ![]() |
『성수시화(惺叟詩話)』에 의하면, 이달은 조선 중기 당시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 시를 배웠다고 한다.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서 이달은 박순(朴淳)에게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 가(歌), 음(吟)과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 등을 통해 당풍을 습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백, 왕유, 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원주의 손곡장(蓀谷庄)에서 칩거하며 5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주1의 글, 유우석(劉禹錫)주2과 위응물(韋應物)주3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운 후,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1572년 경에는 호남 땅을 유람하면서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주4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1578년 봄에는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승진한 손여성(孫汝誠)이 주최한 ‘광한루시회(廣寒樓詩會)’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손여성과 이달을 포함하여 백광훈, 양대박(梁大樸), 임제(林悌), 고경명(高敬命) 등이었으며, 이후 이들과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1580년 최경창이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평양(平壤)에 있을 때 평양으로 찾아가 대동강과 부벽루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평안도를 두루 유람한 후 만년에 평양에 칩거하며 살았다.
이달은 서얼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으나, 또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주5이 됐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으며, 1609년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지내다가 평양의 한 여관에서 죽었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성군청 앞과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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