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동

                                                                                                                                                                                                                                                           

1.개요

경포동은 1998년 10월 1일 강릉시 조례 288호에 의해 유천동, 죽헌동, 운정동, 저동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합친 동으로, 동의 면적은 23.21 km2이고 19개 통, 91개 반이 있다. 유천동은 강릉군 정동면 지역으로 1914년 죽오리를 병합하여 유천리라 하다가 1955년 9월 1일에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8,921총 인구수
4,556인구(남)
4,365인구(여)

4.지명의 유래

  • 운정동(雲亭洞) : 운정동은 원래 강릉군 정동면(丁東面)에 딸린 지역으로 1913년에 선교리(船橋里)를 병합하여 운정리(雲亭里)라 하다가 1955년에 경포면이 강릉시에 편입될 때 난곡동(蘭谷洞)과 합쳐 행정동을 이루었다. 경포면이 정동면이였을 당시 유천리(상리), 대전리(중리), 조산리(하리)등 3개리가 있었으나, 일제때 하남면(河南面)을 없애고 하남면을 반으로갈라 저동리, 안현리는 정동면에 편입시키고, 산대월리, 방동리는 사천면에 편입시켰다. 그후 조산리는 없애고 운정리를 만들었다.
  • 배다리(船橋) : 선교장 앞 활래정이 있는 그 일대, 옛날 경포호의 물이 앞까지 들어 차서 강문이나 초당에서 죽헌으로 가자면, 배를 타고 와서 이곳에서 내렸다. 즉, 배가 닿는 곳에 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동네 이름이 배다리가 되었다.
  • 해운정(海雲亭) : 조선중종 25년(1530년)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하여 해운정 또는 운정리(雲亭里)라 불리웠으며 1963. 1. 21.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난곡동(蘭谷洞) : 난곡동은 원래 강릉군 정동면에 딸린 지역으로 날밀, 난곡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杏亭里와 합하여 蘭谷里라 했으며, 1955년에 강릉시에 편입되어 난곡동이라 했다.
  • 된봉(高峰,천제봉) : 행정말 북쪽 시루봉 뒤에 봉(107m)으로 봉(峰)을 오르기가 힘이 든다고 하는데, “된”은 뒤(後)의 방언 “되”의 뜻으로 “마을 뒤에 있는 “봉”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즈므, 한밭, 날밀, 운정동 4개 부락 사람들이 모여 풍년을 기원하고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씩 천제를 지낸다.
  • 서지(西池, 鼠, 蕙) : 경포동주민센터 앞쪽 골에 있는 마을로 날밀에서 시루봉으로 올라가면서 나타나는 마을이며, 경포호 서쪽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서지는 쥐가 메내는 형국(쥐가 흙을 파는 형국)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날밀(蘭谷) : 오죽헌에서 선교장으로 가면서 난곡교 다리를 건너 왼쪽에 있는 큰 마을로 경포동주민센터가 있는 마을, 따뜻한 남향받이 마을인데 마을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끊어질 듯 하면서 다시 이어져 마치 난초 잎처럼 생겼다.
  • 유천동(楡川洞) : 유천동은 본래 강릉군 정동면 지역으로 1914년 竹梧里를 병합하여 유천리라 하다가 1955년 9월 1일에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유천은 크게 상유천(윗느릅내)과 하유천(아랫느릅내)으로 나누는데 상유천은 땅재봉을 중심으로 서쪽 마을이고, 하유천은 북동쪽 마을이 된다.
  • 땅재봉(堂山峰, 堂峰) : 느릅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제일 높은 봉으로 江陵 四柱山 또는 鏡浦 四柱山의 하나, 회암영당의 堂山이라하여 堂山峰이라 하는데 옛날 이봉 꼭대기에 당을 지어놓고 당제사를 지냈다.
  • 죽 일(竹谷, 梧谷, 竹梧) : 땅재봉 동쪽 난맥에 있는 마을로 홍제동, 교동, 유천동 경계지역이다. 죽일은 중국 晋나라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놀던 곳과 비슷하고, 또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이 마을의 이름이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있는 것으로 봐 한자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마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옛 땅이름에 “○일, ○실, ○밀”로 된 말은 고구려 지명 소의 “忽”과 같은 뜻인데 이는 “고을”을 나타내는 말이다.


<출처: 강릉시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율곡 살린 나도밤나무

율곡 선생의 아버지는 한양에서 벼슬을 살고 어머니는 친정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그러니까 율곡선생의 외할머니가 잔치집에 가고 집에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하고 시아버지하고만 있었대.

시아버지가 낮에 툇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하늘에서 해가 자기 집 마당으로 뚝 떨어지더래. 그래 꿈을 깬 뒤 생각해보니 건 상서로운 태몽이거던. 자기 부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부인이 잔치집에 가고 없으니 부인에게 아이를 잉태시킬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마침 사위가 왔단 말이야. 그러니 사위하고 딸이 관계를 할까봐 집안에 돌아다니며 기침을 한다, 마당을 쓴다 하면서 훼방을 놓더래. 그런데 누가 밖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십여년 전에 헤어진 절친한 친구가 찾아 왔거던. 그러니 얼마나 반가운가. 그래서 시아버지가 “너희들은 저 방에 들어가서 잠깐 있거라” 하고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사위와 딸이 생각이 나서 그 방에 가보니 그 사이에 그만 일을 저질렀더래. 그래서 낳은 아이가 이율곡 선생이야.

이율곡 선생이 점점 자라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일인데 어느날 도사가 지나가다가 율곡 선생의 관상을 보더니 “이 아이는 참 훌륭한 인물이 될 터인데 범한테 물려갈 액운이 끼어있으니 아깝구나.” 이런단 말이야. 이 말을 들은 부모가 깜짝 놀라 그 액운을 피할 방법을 물으니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참 어려운 일이라서 곤란합니다.” 하고 난처해 하더라는 게야. 그렇지만 비록 어려운 방법이라도 있다고 하니까 “무슨 방법인지 제발 알려주십시오.” 하며 매달렸단 말이야. “올 해 안에 밤나무를 천 그루를 심되 이 아이가 자기 힘으로 심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아홉 살 밖에 안된 아이가 스스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한다이거야.

그러니 이 아이가 날마다 산에 가서 부지런히 밤나무를 심었대. 그래 그해 섣달 그믐까지 천 그루를 심는다는 것이 실은 한 그루가 모자란 999 그루였거던. 율곡이 천 그루를 다 심은 줄 알고 돌아오는데 범이 앞에 나타나더니 “밤 나무 천 그루를 심었더라면 너는 살았을 텐데 한 그루가 모자라니 너를 잡아 먹어야겠다.” 이러면서 달려들자 밤나무 비슷하게 생긴 나무가 소리치기를 “나도 밤나무다.” 이러니 범이 천 그루를 채운 줄 알고 율곡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갔대.

그래 그 나무를 나도밤나무라 부르게 된 게야. 이래서 율곡은 밤 율(栗)자, 골 곡(谷)자를 쓴단 말이야.

선교장 앞에 아주 오래된 나무가 지금도 있어. 그게 나도밤나무야.

1. 조사일자 : 1994. 4. 26 2. 제 보 자 : 조영대(85세, 남, 사천면 사기막리)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경포대초등학교
고등학교 : 강릉문성고등학교
대학교 : 강릉원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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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