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항 배후 물류유통 요충지로서 전통 재래시장 및 상가 등 상권이 밀집한 상업중심지역으로 울릉도 여객선 및 묵호역․묵호항 어판장 등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이 많이 왕래하고 있는 지역이다.
사뭇재 말랑에서 서쪽 골안에 있는 마을. 마을엔 11가구가 살고 있고 서낭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낭제를 지내지 않는다.
묵호 초등학교 뒤에 있는 마을, 밭 가운데 마을 서낭당이 있다
향로봉 아랫쪽에 있는 큰 바위터. 동해바다에서 비치는 햇빛이나 달빛이 이 바위사이를 통해 부곡에 있는 진주군 심동로의 묘에 비치므로 심씨들이 신기하게 여겨 해와 달이 넘나드는 의미에서 일월문터라 했다. 그런데 이 바위는 묵호 항구를 만들 때 쓸 돌을 만들기 위해 향로봉과 같이 헐어서 없어졌다.
이 비는 고려말 문신인 신재공 심한의 심도비 (信齋公 沈漢의 神道碑)이다. 심한이 1361년(공민왕10)에 벼슬을 버리고 삼척으로 낙향하자 공민왕이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東老”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후에 진주군(眞珠君)에 봉하여졌다.
비는 동해시 발한동 시가지 도로변에 접하여, 도로를 제외한 주위가 민가에 둘러싼 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고려예의판서호신재심공신도비명(高麗禮儀判書號信齋沈公神道碑銘)’이라고 쓰여있고, 전면에는 신재공의 선조와 공의 내력, 후면에는 기문과 후손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나 측면에는 내용이 없다. 비문은 사헌부대사헌 겸 경연관원자우유선인 이성보(李城輔)가 지었고, 글씨는 전(前)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지제교인 이석우(李錫祐)가 썼으며, 영춘현감인 유한지(兪漢之)가 지었다.
비는 장방형의 농대(壟臺)와 가첨석[1](加檐石)을 갖추고 있는데, 농대와 가첨석은 화강암이며 농대의 하부는 시멘트로 채워진 바닥에 묻혀 있어 현재는 상면만 볼 수 있다. 가첨석은 팔작지붕 형태로 간단하게 모양만을 내고 있다.
크기는 비신이 높이 248cm, 너비 98cm, 두께 15cm이고, 가첨석은 높이 35cm, 최대 너비 125cm이며, 농대는 현재 보이는 높이 19cm, 너비 145cm, 두께 58cm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형식으로, 4기둥은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놓여 있다. 비각의 전면은 출입용도의 쪽문을 두고 2단으로 살대를 만들었으며, 나머지 3면은 하단은 벽채를 만들고 상단만 살대를 설치하였다.
초등학교 : 동호초등학교, 묵호초등학교
중학교 : 동해중학교, 묵호여자중학교, 묵호중학교
고등학교 : 동해상업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