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읍

                                                                                                                                                                                                                                                           
 

1.개요

홍천읍은 홍천군의 중심지로 홍천군의 군청 소재지이자 교통,산업,문화의 중심지이다.

2.인구

2021년 기준(자료갱신일: 2021.3) / 단위 : 명
34,486총 인구수
17,450인구(남)
17,036인구(여)

4.지명의 유래

  • 갈마곡리(葛麻谷理) : 홍천읍의 동북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홍천읍)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화양교 건너편 남산쪽의 짓골, 속개, 닥바우를 병합하여 갈마곡리라 하였다.

  • 검율리(檢律里) : 홍천읍(洪川邑)의 동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 송유리(松柳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당뿌리, 음달말을 병합하여 검율리라 하였다. 동쪽은 여우고개, 서쪽은 갈마곡리, 남쪽은 짓고개, 북쪽은 태학리에 연접함.

  • 결운리(決雲里) : 홍천읍(洪川邑)의 동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화촌면의 겨룬이 또는 결운리(決雲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둔지, 점말을 병합하여 다시 결운리라 하고 군내면 (홍천읍)에 편입됨.

  • 삼마치리(三馬峙里) : 홍천읍(洪川邑)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본래 홍천군 남면의 지역이었으며, 삼마치 고개 아래가 되므로 사무라치 또는 삼마치(三馬峙)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너픈터, 독골, 솔골, 새말, 원터를 병합하여 삼마치라 하고, 1962년에 홍천읍에 편입됨.

  • 상오안리(上吾安里) : 홍천읍(洪川邑) 서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남면)의 지역이었으며, 오안리 (吾安里) 위쪽이 되므로 상오안(上吾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웃말 (상촌(上村)), 새술막(신주막(新酒幕)), 공골(공곡(貢谷)), 며느리고개말(부치촌(婦峙村)), 청룡우(靑龍隅)를 병합하여 상오안리라 함.

  • 신장대리(新場垈里) : 신장대리(新場垈里) [새 장터] : 홍천읍(洪川邑)의 중심부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 (홍천읍)의 지역이었으며, 새로 장(場)이 섰으므로 새장터 또는 신장대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터를 병합하여 신장대리라 하며, 3개의 행정리로 나뉘어 있음.

  • 연봉리(蓮峰理) : 홍천읍의 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 지역이었으며, 조선조 때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연봉역(連峰驛)이 있던 곳이므로 연봉이라 하였는데,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배목기, 관텃골, 절골, 밤나뭇골을 병합하여 연봉리라 함.

  • 와동리(瓦東里) : 홍천읍(洪川邑)의 동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터, 와촌, 동막을 병합하여 와촌(瓦村)과 동막(東幕)의 이름을 따서 와동리라 함.

  • 장전평리(長田坪里) : 홍천읍(洪川邑)의 서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남면)의 지역이었으며, 긴 밭이 있으므로 긴밭들 또는 장전평(長田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골, 논꼴, 먹실, 안흥리, 지둔지를 병합하여 장전평리라 하여 현내면(홍천읍)에 편입됨. 현재 2개의 행정리로 나뉘어져 있음.

  • 진리(津里) : 홍천읍(洪川邑)의 동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홍천읍)의 지역이었으며, 나루가 있었으므로 나루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리라 하였으며 3개 행정리로 되어 있음.

  • 태학리(太學里) : 홍천읍(洪川邑)의 동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화촌면의 지역이었으며, 대기 또는 태학리 (太學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기, 여냇골을 병합하여 태학리라 하여 홍천면(洪川面)에 편입되었다.

  • 하오안리(下吾安里) : 홍천읍(洪川邑) 서남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남면)의 지역이었는데, 오안리 (吾安里) 아래쪽이 되므로 하오안(下吾安)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시울, 굴골, 도새울, 둔지미, 오리나무정을 병합하여 하오안리 라 하여 군내면(郡內面)에 편입됨.

  • 희망리(希望里) : 홍천읍(洪川邑) 북쪽에 위치한 리로서 본래 홍천군 현내면(홍천읍)의 지역이었으며, 희망동 (希望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숲밭, 개때배기, 오리정을 병합하여 희망리라 하며, 8개 행정리로 나뉘어져 있음.
     

<출처: 홍천군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벼락소 이야기

 
물 속에서 벼락 맞은 구렁이 이야기가 전해져 지금도 이 곳 주민들은 이곳에서 목욕하기를 꺼린다는 전설 


옛날 홍천고을에 사이좋은 두 친구가 있었다. 둘은 밭일을 할 때나 나무를 하러갈 때에는 항상 어울려 다녔다. 두 젊은이는 어느 해 여름, 나무를 하러 지금의 벼락소 부근까지 왔다.

날씨가 무더워 두 젊은이는 옷을 바위에 벗어 던지고 소에서 목욕을 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몸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우르릉 꽝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깜짝 놀란 두 젊은이는 급히 옷을 입고 주위를 살폈으나 몸을 숨길만한 곳이 없어 한 바위 밑을 찾아 들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자꾸 불어나 두 사람은 차츰 바위 위까지 쫓기어 올라갔다.

물이 불어나는 것을 지켜 보던 한 젊은이가 갑자기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놀란 그의 친구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 속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물결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구렁이는 젊은이들이 있는 바위에 몸을 붙이더니 서서히 바위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두 젊은이는 구렁이가 사는 곳에서 목욕했다는 것이 무서웠고 구렁이가 차츰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저 구렁이 봐라. 용이 돼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소리 치고는 혼비백산하여 그만 까무라쳤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에게 벼락이 떨어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뜨거운 햇빛에 두 젊은이는 정신을 차렸다.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고 비는 멈췄으며 골짜기에는 물소리만 요란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두 젊은이가 있던 바위는 분명 하나였는데 두 개가 되어 물 한가운데 떠있었고 맞은편 바위에는 벼락 맞은 구렁이 시체가 얹혀 있었다. 둘은 부랴부랴 마을로 내려와 그들이 겪은 일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소를「벼락소(沼)」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부근 주민들은 구렁이가 살았다고 해서 이 곳에서 목욕하기를 꺼리고 있다 한다.

만화로 보는 홍천이야기(벼락소)
<출처 : 홍천문화원>

 

5.2.계영배 전설

술을 잔에 가득 부으면 사라지고, 가득 부어 놓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계영배'라는 술잔을 통해 술을 과하게 마시지 말라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

홍천 산골에 질그릇을 구워 파는 우삼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항상 질그릇을 굽는 일 보다는 사기그릇으로 유명한 분원으로 나가 일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런 소망을 다져온 그는 짐을 꾸려가지고 분원으로 가서 지외장에 제자가 되었다.

고향을 떠날때부터 남달리 큰 뜻을 품었는지라 사기그릇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느라고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밥 먹고 잠자는것도 잊을 때가 많았다. 흙만 가지고 사기그릇 만들고 연구하는 일에만 정진한지 8년. 그의 기술은 뛰어난 경지에 도달했다. 스승도 그를 사랑하고 기술을 칭찬하여 사제간의 정이 매우 깊었다.

피 땀어린 노력 끝에 이루어진 그의 기술은 만인의 인정을 받아 마침내 왕에게 진상할 반상기를 만들게 되었다. 스승은 제자의 영광에 기쁨을 감추지 못해 새 옷을 만들어 입히고 명옥(明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삼돌이」란 호칭 대신「明玉」이라는 유명한 도공으로 만인으로부터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명옥이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자기들 보다 늦게 들어와 빨리 출세한 명옥을 칭찬하기는 커녕 시기하여 그릇이 잘 안만들어지게 할 흉계를 꾸몄다. 마음이 착한 명옥은 친구들의 음흉한 속셈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밤낮으로 그릇 만드는 일에만 성심성의를 다했다. 드디어 반상기가 완성되어 임금님께 진상됐다. 왕은 반상기를 받아 보고 그 재주를 창찬하여 특별히 상금까지 내렸다. 그 후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릇을 주문해 왔다. 명옥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일했고 돈도 상당히 모으게 되었다.

어느 날 명옥은 지친 몸을 쉬려고 할 때 동료들이 찾아와 뱃놀이를 가자고 유혹했다. 동료들은 술과 계집을 모르는 명옥에게 술과 계집을 안겨 미치게 하여 다시는 도자기 연구를 못하도록 계략을 짠 것이다. 동료들은 예쁘고 요염한 한 기녀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서 명옥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단단히 당부를 했었다. 소내강에는 배 한 척이 두둥실 뜨고 배 안에서는 노래 소리가 흥겹게 퍼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기녀들도 명옥이가 돈을 많이 모았다는 소문을 들었는지라 제각기 아양을 떠느냐고 야단 법석이었다. 명옥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술과 계집에 미쳐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녀들의 향긋한 분냄새가 자주 코 속으로 스며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날 명옥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아침도 먹지 않고 돈주머니를 차고 기녀 집으로 달려가 하루 종일 기녀들을 희롱하며 술을 마셨다. 다음날도, 또 다음 날도 그는 술과 계집에 취했다. 동료들은 자기들의 계략이 들어 맞았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스승은 명옥의 일을 걱정하면서 속을 썩였다. 처음엔 언제가 마음을 고쳐 먹겠지하고 기다렸으나 명옥의 방탕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스승은 명옥이가 노는 술 집으로 찾아가 마당에 거적을 깔고 꿇어 앉아 눈물로 정신 차릴 것을 애원했다.

이럴 즈음 명옥의 동료들은 그를 영영 질그릇꾼으로 만들기 위해 또 한 꾀를 생각해 냈다. 이때 명옥은 있는 돈을 술과 계집에 모두 탕진해 버려 생활이 몹시 궁핍했다. 촌으로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질그릇을 외상 주고 가을 추수 떄 곡식으로 받으면 이익이 많으니 질그릇 장사를 하자는 꾀임이었다. 당장 돈이 아쉬우므로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해남으로 떠났다. 그러나 하늘이 도움인가, 명옥의 재주를 아까워 함인가. 중도에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혔으나 동료들은 모두 빠져 죽고 명옥만 혼자 구출되었다. 널빤지쪽을 붙들고 바다에 떠 있다가 간신히 고기잡이 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명옥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지난날의 방탕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몸이다. 열심히 연구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 보자”고 굳게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매일 새벽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몸에 찬물을 끼얹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석달 열흘동안 백일기도를 드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는 다음날부터 방에 들어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었다. 그런지 얼마지난 섣달 그믐날 명옥은 조그만 술잔 하나를 스승인 지외장에게 바쳤다. “선생님, 그동안 은혜가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덕택으로 이런 술잔을 만들 게 되었아오니 한번 보십시요”하면서 그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놓았다.

그러자 술잔에 가득하던 술이 한방울도 남지 않고 없어졌다. 이 때 잔은 햇빛을 받아 찰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기하기 한량 없었다.

스승은 잔을 이리저리 한참 동안 훑어 보다가 “이 잔은 술잔이므로 사람이 술을 마시게 될터인데 술이 없어지면 어찌하나?”하고 물었다. 명옥은 이번에는 “자 보십시요”하면서 잔에다 술을 반쯤 부었다. 그러자 술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가득 부어 놓지 않으면 술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 술잔을 계영배(戒盈盃)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스승은 그제서야 무릎을 쳤다. 명옥이가 술로서 망했으니 술을 조심해서 마시라는 뜻에서 과하게 마시지 말라는 교훈이 담긴 것으로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은 또 다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그 술잔은 의주의 임씨라는 사람이 우연한 일로 깨뜨렸는데 이상한 일은 그 잔이 깨어지던 날 명옥도 세상을 떠났다 한다.

 

 

신묘한 술잔 "계영배" 웹툰 1화
신묘한 술잔 "계영배" 웹툰 2화
신묘한 술잔 "계영배" 웹툰 3화

 

5.3.며느리 고개

짚신을 찾으러 갔다가 며느리를 잃어버린 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며느리 고개'로 언제부터인가 혼사를 치르러 가는 행렬이 이 고개를 지나면 나귀 발급이 떨어지지 않거나 며느리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한다.

홍천읍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국도를 따라 12km쯤 가면「며느리고개」가 있다.

옛날 어느 해 봄날이었다. 영(嶺) 넘어 외토라진 고갯길을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나귀 등에 짐을 싣고 걷고 있었다. 사돈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수목이 울창하고 그 밑에 성황당이 자리잡은 산무르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시아버지는 나귀 등에 얹었던 짚신 꾸러미가 없어진 것을 보고 며느리에게 “아가야, 짚신을 잃어 버렸으니 내가 찾아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하고 나귀를 돌려세워 가지고 고개를 되돌아 내려왔다. 그러나 짚신은 없었다.

시아버지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부랴부랴 며느리가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 왔다. 되돌아 온 시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기다리고 있어야 할 며느리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해 저문 골짜기를 향해 “아가야, 아가야”하고 목이 터져라 부르며 산길을 헤맸다. 아무리 불러도 시아버지의 애절한 목소리만 산울림이 되어 돌아올 뿐 어둠이 깔린 고개는 조용하기만 했다.

간간이 짐승들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며느리 목소리가 아닌가 하고 귀를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시아버지는 발길을 돌리려고 나귀 고삐를 잡아 당겼으나 이상하게도 나귀 발굽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아 할 수 없이 나귀를 뒤에 두고 고갯길을 넘어왔다. 그 후 며느리는 산도적에게 잡혀갔다기도 하고 맹수에게 잡혀 먹혔다고도 하는 말만 전해질 뿐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부터 이 고개를「며느리 고개」라 불렀다 한다. 언제부터인가 혼사를 치르러 가는 행렬이 이 고개 마루턱에 이르면 나귀 발굽이 떨어지지 않거나 며느리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전해 온다. 이런 연유 때문에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인데도 이 고개를 넘지 않고 60리 길을 돌아 다닌다고한다.

<출처: 홍천문화원>

 

 

5.4.삼마치의 전설

홍천과 횡성을 잇는 경계에 삼마치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고 고개 마루에는 오음산(五音山)이라는 높은 산이 있다.

옛날 이 고을 사람들은 오음산에서 다섯 명의 장수가 나리라는 풍수설을 믿었다.

당시에는 고을에서 장수가 나면 마을이 편안하지 못했다고 했다.

고을 사람들은 이 산에서 장수가 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음산 골짜기 바위굴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창을 꽂았다. 그랬더니 과연 장수의 혈맥이 끊겼던지 검붉은 피가 용솟음치며 다섯 개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사흘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려왔다.

그 뒤 3일이 지난 저녁, 주인을 잃은 세 필의 백마가 나와 힘 없이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은 그후부터 이 산을 오음산, 이 고개를 삼마치라 불렀다 한다.

삼마치의 전설 웹툰
<출처: 홍천문화원>

 

5.5.이괄암의 내력

홍천읍에서 갈마곡다리를 건너 10리쯤 동쪽으로 가면「이괄산성」이라 불리는 성 터가 있다. 이 곳에는 높이 80m나 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이괄암」이라 한다.

때는 1624년(조선 인조2년),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행상에서 겨우 2등공신으로 봉해지자「이괄의 난」으로 불리우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린 이괄은 어려서 무술을 익히며 자란 홍천 산골을 찾아 들었다. 산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명주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깊은 소가 있었다. 이괄은 그 옆에 정자를 짓고 애첩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소일했다고 한다.
바둑을 둘때 애첩이 지면 깊은 소에 그녀를 던졌다가 꺼내 올리고 자신이 지면 건너편 바위에다 줄을 매고 줄타기를 하는 목숨을 건 내기를 했다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괄이 노닐던 바위라 하여 그 바위를 李适岩이라 불렀다 한다.

 

5.6.학명루의 유래

옛날부터 홍천 읍내에는 집들이 아담하게 들어 앉아 있고 산수가 맑고 아름다웠다. 백성들은 농사가 잘 되고 나무들이 울창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올라가 주위를 바라볼 만한 樓臺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럴 즈음 尹 志라는 사람이 수령으로 부임해 왔다. 윤 지는 사람이 착하고 총명하여 부임 한 달만에 고을 일을 크게 바로 잡았다. 그는 고을 사람들의 뜻을 받아 들여 객관의 동쪽에 누대를 세웠다. 누대 앞에는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여가가 있을 때 마다 누대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며 답답한 가슴을 폈다.

하루는 마을 노인들을 정자에 초청하여 낙성 잔치를 베풀었다. 윤 지는 그 자리에서 누대 이름을 무엇으로 짓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노인들에게 물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이 객관 앞 수 십보 거리에 학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다리가 완성되는 날, 학이 날아와서 울었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입니다. 청컨대 학은 이 고을의 선암이니 누대 이름을 학이 날아와서 울었다는 이야기에 연유시켜 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고 했다.

윤 지는 이 노인의 뜻에 따라 누대 이름을 鶴鳴樓라고 지었다 한다.

 

5.7.남산 시신

홍천읍 남쪽에 南山이라는 등산이 있다. 이 산에 시체를 남 몰래 묻으면 가정에 복이 오고 큰 운이 깃든다고 믿어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시체를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산의 거북 등에다 시체를 묻으면 홍천지방에 큰 가뭄이 들고 향교의 정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고 한다. 남산의 거북등은 마치 거북이 모양으로 돼 있어 흥미롭다. 옛날 가뭄이 심할 때는 군수가 石花山에 올라 기우제를 드렸다.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남산초등학교,석화초등학교,오안초등학교,주봉초등학교,홍천초등학교
중학교 : 홍천여자중학교,홍천중학교
고등학교 : 홍천고등학교,홍천농업고등학교,홍천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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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